-
문법책 1독으로 안 되는 이유정자동 통신 2013. 11. 27. 14:02
두 개의 손이 그림 속에서 나와 그림을 그린다. 그림 속의 손이 그리는 것은 바로 ‘자기를 그리는 손’이라는 사실이 재미있다. 네덜란드의 판화가 에셔(M. C. Escher)의 <그리는 손>이란 작품이다.
언어를 공부하는 데도 닭과 알의 문제가 존재한다
이 그림이 제기하는 문제는 속담이나 예술 작품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처해 있는 현실이 그렇다. 둘이 서로 맞물려 무엇을 먼저 해결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정말 많다. 어떤 이는 이런 상황에서 좌절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마중물을 넣고 열심히 펌프질을 해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게 하듯 이 역설을 해결한다.
<그리는 손>의 역설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인간의 언어가 처한 상황이다. 이를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하고, 그 가장 단순한 형태가 단어와 문장 사이의 관계이다. 단어의 뜻을 알아야 문장의 뜻을 알지만, 문장의 뜻을 알아야 단어의 뜻을 아는 게 인간 언어가 가진 역설이다. 처음에는 둘 다 알 수 없으니, 애초 문장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이 논리적 결론이어야겠지만, 그런 일은 없다. 누구든 일상적 언어에서 해석학적 순환 때문에 곤란을 당하지 않는다. 태어나서 자라며 언어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수많은 경험적 지식이 축적되었고, 그 결과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는 그 순환의 고리를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적 삶의 차원을 조금만 떠나게 되면 해석학적 순환이 문제가 될 때가 많다. 특히,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런 경우를 절감한다. 단어와 문장, 문장과 단락, 단락과 배경지식 등이 서로 맞물리면서 글의 이해를 방해하게 되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막막할 때도 있다. 그런 현상이 가장 심한 경우가 문법이다.
문법은 전통적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품사를 다루는 부분과 구문을 다른 부분이다. 품사를 다루는 부분은 문법을 단어의 차원에서 다룬다. cat은 명사, run은 동사, 하는 식의 설명이 많다. 구문을 다루는 부분은, a cat은 주어이며 runs는 동사인데 이것이 <주어+동사>의 형태로 연결되어 ‘A cat runs.’와 같은 문장이 만들어진다는 식으로 가르친다.
문제는 품사와 구문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다. 명사는 주어가 될 수 있는 말이다. 예를 들어 cat가 명사인 건 문장의 주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어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명사에 대한 이해 또한 불완전하다.
품사를 먼저 공부해도 문제... 그렇다고 구문부터 공부할 수도 없다
일반적인 문법책에서는 품사를 먼저 배우고 나중에 구문을 배운다. 당연히 첫 문법 공부에서 품사에 대한 이해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아직 구문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구문부터 배울 수는 없다. 아직 명사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명사가 주어가 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첫 문법 공부가 어려운 것은 구문을 모르는 상태에서 품사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얻는 불완전한 품사 지식으로 구문을 공부하니 그 지식 또한 토대가 부실하다. 당연히 그런 식으로 한번 뗀 문법 공부는 완전할 수가 없다. 문법책을 한 번 완전히 끝냈는데도 문법을 잘 모르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서로 맞물린 순환의 고리 때문이다.
외국어로서 영어를 배우는 사람에게 문법적 지식이 필수적이라고 한다면, 그 문법 지식이 어느 정도 체화되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공부가 필요하다. 한 가지 문법책을 여러 번 보는 것도 좋지만 빠른 속도로 실력을 향상시키려면, 문법책의 수준을 조금씩 높여가면서 여러 번 공부해야 한다. 나선의 계단을 올라가듯 서서히 품사와 구문에 대한 지식과 감을 높여나가는 것이 핵심이다.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영문을 읽으면서 계속 그 지식을 적용해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리는 손>의 역설을 초월해서 더 높은 영어의 세계로 나아가는 왕도는 따로 없다. 반복적이고 꾸준한 배움(學)과 익힘(習)만이 유일한 길이다.
ⓒ김유철 (분당 정자동 인사이트영어학원 031-717-1957)
'정자동 통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영사전이 필요할 때 (1) 2013.12.20 글의 허를 찌른다 (1) 2013.12.14 10년을 공부해도 말 한마디 못한다는 분들 (2) 2013.11.14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영어학습의 도구 (0) 2013.11.14 수능영어는 종합적 사고력 평가다 (0) 2013.11.11